주변 관광지
Cultural Remains 01.
소재 : 신지리 / 유형문화제 제 79호
선암서원
이 서원은 유형문화재 제79호로서 삼족당 김대유, 소요당 박하담 두분을 향사하던 곳으로 한국학의 보고라 할 수 있다.
원래는 매전면 동산리에 운수정을 세우고 1568년부터 두 분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하였다. 그 후 조선 선조 10년(1577)에 군수 황응규의 주선으로 위패를 현재 위치로 옮기고 선암서원이라고 불렸다.
현재 건물은 고종 15년(1878) 소요당 선생의 후손들이 다시 중건한 것을 다시 이름을 선암서당으로 고쳤다.
소규모 건물이지만 특이한 구조로 많은 방문객들이 찾는 유서깊은 권역의 문화재이다.
Cultural Remains 02.
소재 : 신지리 / 보물 제917호
배자예부운략
"배자예부운략"은 시부(詩賦)를 지을 적에 운(韻)을 찾기 위하여 만든 운서(韻書)로 사전의 일종이다.
주로 과거에 응시하는 선비를 위하여 만든 것이므로 과거를 관장하는 주무부서인'예부(禮部)'의 명칭을 붙인 것이다.
크기 세로 20.5cm, 가로 46.2cm 이고 두께 1.8cm이다.
보물 제917호로 지정되었으며 선암서원이 소유하고 있다.
Cultural Remains 03.
소재 : 신지1리/ 중요민속자료 제106호
운강고택
소요당 박하담(逍遙堂 朴河淡 1479~1560)이 벼슬을 사양하고 이곳에 은거하며 서당을 지어 후학을 양성하던 옛터에 조선 영조 2년서당을 지어 후학을 양성하던 옛터에 조선 영조 2년(1726) 박중응이 살림집으로 건축했으며 순조 24년(1824) 운강 박시묵이 크게 중건했다 한다.
운강은 후학양성에 크게 주력하여 고종 9년(1872) 「강학소절목」을 마련해 교육기관으로서의 기틀을 뚜렷이 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고 한다.
이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가 별도로 ㅁ자형으로 되어 쌍ㅁ자형을 이루고 있는 대주택으로 안채, 사랑채, 중사랑채, 행랑채, 대문채, 곳간채와 가묘를 갖추고 있다. 짜임새 있는 구조와 필요에 따라 세분된 각 건물의 평면배치 및 합리적인 공간구성 등이 한층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류주택이다.
Cultural Remains 04.
소재 : 신지1리 / 중요민속자료 제106호
만화정
만화정은 운강고택에 딸린 누정건축물로, 운강(雲岡) 박시묵이 1856년경 건립하여 수학·강론하였던 곳 이다.
만화정은 근대화 교육의 강학소(講學所)로 사용된 유적지이며,
그의 아들 진계(進溪) 박재형 (朴在馨,1838~1900)이 해동속소학, 해동속고경중마방 등 38권의 저서를 남긴 학문의 요람이다.
또한 만화정(萬和亭) 터는 조선 중기 소요당 박하담 선생이 남명(南冥) 조식, 삼족당(三足堂) 김대유와 도의지교(道義之交)를 이루었던 곳이며 그 후 소요당의 증손자 용암 박숙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소요당의 손자와 증손자들로 조직된 14의사(義士)를 조직하여 만화정 앞뜰에서 창의(倡義)를 한 곳이기도 하다.
Cultural Remains 05.
소재 : 신지1리 /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68호,
섬암고택
문화재자료 제268호인 섬암고택(剡巖故宅)은 운강(雲岡) 박시묵(朴時默)의 둘째 아들인 박재소(朴在韶, 1840~1873) 선생이 분가하면서 건립한 것으로 운강고택(雲岡故宅)의 남서쪽에 위치하며 사랑채와 대문채는 1990년 도로확장공사로 인해 철거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이 집 대문 앞마당의 사랑채가 있었던 자리는 빈자리로 남아 있고, 중문채 앞에 슬레이트지붕의 허름한 사랑 곳간채가 남아 있다.
Cultural Remains 06.
소재 : 신지1리 /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71호
도일고택
문화재자료 제271호인 도일고택(道一故宅)은 운강고택의 길 건너편에 있는 전통 가옥으로 박시묵의 동생인 박기묵(朴起默, 1830~1911)이 고종 14년(1877) 합천군수로 재직할 때 신축하여 합천군수댁이라 불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20세기 초 삼종질인 재수의 소유가 되면서 도일고택(道一故宅)이라 부르고 있다.
Cultural Remains 07.
소재 : 신지1리 /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69호
명중고택
조선 후기 운강 박시묵의 손자인 박래현(1861∼1896)이 고종 18년(1881)에 세운 가옥이다.
그 뒤 둘째 아들 박순희(1896∼1934)가 입주하여 '명중고택'이라 하였다. 대문채를 들어서면 사랑마당이 보이고 중사랑채를 지나면 안채인 정침이 있다. 정침의 대청 전체에 문을 달아 당시 폐쇄적인 양반댁 부녀자의 생활 양식을 보여 준다. 1990년 국도 공사로 대문간채와 사랑채를 철거하였고, 중사랑채도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다
Cultural Remains 08.
소재 : 신지리 /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70호
운남고택
박시묵의 셋째 아들 박재충의 집으로 1865년 (고종2)가공하였으나, 1869년 박재충의 사망으로 건축이 중단되었다. 이후 운남 박좌현이 1892년(고종29)에 완공하고 거주하여 운남고택이라고 부른다.
一자형 평면으로, 안채,사랑채, 대문채,헛간채로 구성되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 왼쪽 중문 안에 안채와 헛간채가 ㄴ자집으로 배치 되었다. 원래 안마당 동쪽에 중사랑채가 있었으나 1935년경 불타 없어졌다. 사랑채 대청의 보와 보괴임의 구조가 특이하고 아름다운 고택이다.